세대별 차생활
- gayewon
- 2016년 1월 12일
- 5분 분량
“茶의 첫걸음은 참으로 어렵기 그지 없다. 차 실에 들어오기 전 洗禪하는 자세여야 한다. 자기 성찰의 자세에 들어가 무상무념의 세계로 또는 무심의 세계로 들어가 마음을 안정하여야만 正道인 다도에 몰입할수 있다. 본래 차에는 五味가 있고, 四香이 있고, 禮儀가 있으므로 다도에 정성을 들이면 길고도 험한 人生史에 크나큰 보배를 얻어 즐겁고 풍요로운 삶이 되리라 생각한다.”
“茶의 길을 택한 것을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항상 평화로운 마음, 부지런한 마음과, 노력하는 자세 등을 익하고, 배워 가족과 남에게 헌신하며, 모든 것을 배워 가족과 남에게 헌신하며, 모든 것을 베푸는 자세이어야 한다. 행복은 결코, 남이 주는 것이 아니며 내 자신이 만들어 가야만 하는 것이다. 이해와, 용서와, 사랑으로 茶의길을 함께하는 많은 차 인들을 기대해 본다. “
1. 시대 별 차생활에 대한 이해
우리나라의 차의 역사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27대 왕인 선덕왕대 최초로 우리나라에 차가 들어 왔으며 차나무는 828년 흥덕 왕 3년에 당의 사신 김대겸이 당의 문종으로부터 그 종자를 받아와 지리산 화계동 쌍계사에 심음으로써 성행하게 되었다고 하며 또한 차에 관한 다른 기록과 유적들을 살펴보면 1세기의 수로왕비에 대한 전설을 시작으로 4,5,6세기의 고분벽화, 6세기의 백제 성왕 조, 7세기의 신하 선덕왕조 등 상당한 근거들을 찾아 볼 수 있으며, 세기 초에는 당나라에서 돌아온 대렴 공이 차종 자를 가져 왔고 왕명에 의하여 지리산에 심게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여러 문헌을 참고해 보면 차는 AD 500년경 중국에서 시작되었으며 차문화가 발달한 일본의 역사는 백제의 도래 승 “행기”보살로부터 전해진 것으로 한국의 차 역사는 일본보다 대략 350여 년을 앞서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삼국시대의 차생활
삼국유사와 같은 여러 기록을 보면 차를 불전에 공양하고 임금님께 공헌하였다고 쓰여 있으며 경덕왕때 해마다 3월3일과 9월9일에 경주 남산 삼화령에서 석가세존에게 차를 달여 공양했다는 충남 사 스님들이나 원효대사, 설총 등의 승려들을 중심으로 성행했으며 화랑도들도 그들의 수련지인 강릉 한 송정에서 몸과 마음을 수련하며 차를 즐기는 등 민중보다는 특권 계급층의 기호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차와 승려가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된 이유는 졸리는 눈을 뜨게 하고 머리를 상쾌하게 해주는 차의 茶理的 특징과 정신적인 수행을 크게 강조하는 불교의 특성 때문이라고 하겠으며 茶는 불교와 함께 도입되었고 전파되었기에 오늘날 차나무가 야생하고 있는 곳이 사찰 주변임은 이 때문이라 생각된다
2. 고려 시대의 융성
“고려사”에 오늘날의 다방이라는 명칭이 쓰여졌다는 것만을 보아도 고려시대에 차가 얼마나 성행하였는지를 가히 짐작 할 수 있으며 임금이 신하에게 차를 하사하고 신하는 임금에게 차를 올리는 등 왕실이나 귀족들 사이에서 茶가 널리 유행하였고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고려시대의 차는 국가제인 “八關會”등의 차 행사를 주최 하는 등 불교의식의 필수품으로까지 등장하기에 이른다.
차의 관리는 주로 사찰에서 주관했으며 다도의 사치화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데 즉 기호 이상으로 예식화 했으며 고도로 발달되어 송나라에서 차구와 차를 수입하는 등 그 문화가 극도로 발달되었는데 특히 고려자기도 茶禮의 유행의 영향을 받아 극도의 미를 창조하게 되고 발달하게 되었다고 하며 우리 차가 전국에 확산되고 생활 속에 뿌리내린 시기는 고려초기라고 전해진다.
3. 이조 시대의 쇠퇴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중시한 抑佛崇儒 정책을 편 조선시대의 정치적 배경과 담배, 술, 숭늉 등의 유행으로 茶禮는 점차로 쇠퇴하게 된다. 이조 중기에는 차나무를 캐어 버렸다고 전해지며 차문화도 함께 잊혀지게 되었으며 더욱이 국난을 겪으면서 차 산지는 노동력 격감으로 쇠퇴해지고 실학이 배척당하면서 더욱 차의 재배나 생산은 어려워졌고 조선 후기에는 쇠퇴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하지만“차를 마시면 흥하고 차를 모르는 민족은 쇠퇴한다”고 한 다산 정약용 선생, 우리나라 최초의 茶書를 저술한 초의 선사, 추사 김정희 선생을 통하여 그 명맥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것이라 하겠으며 옛 성현들은 차를 군자처럼 아기가 없다 하여 이를 사랑했고 茶禮는 년 중 행사의 하나인 민속으로 전승되어 다 맥을 이어온 것이다.
4. 오늘날의 차 생활
1900년대 초기에 우리 차는 남해안의 몇몇 사찰과 극소수의 가정에서 겨우 명백을 이어온 듯하더니, 해방 이후에는 잠시 홍차로서 상당량 보급되다가 커피에 밀려 이름조차 잃어버린 상태로까지 전락했고 우리와는 대조적으로 한국 차가 쇠퇴하기 시작한 16~17세기부터 일본의 차는 부흥기를 맞게 되었으며 몇몇 차 인들에 의해서 극도로 규범화시키고 작위적 행동미로 다듬어 일본 다도로서 정립하여 오늘날 일본 차문화를 바탕으로 일본 특유의 일본 국민 정민을 확립하기까지 성공하였다. 한편 중국과 그 주변국은 과거도 현재도 한결같이 그들의 차를 마시면서 수입음료를 마시는 국민을 질시할 만큼 차 마시는 민족으로서의 긍지를 지켜가고 있다.
한국에서도 1970년도에 들어오면서 뜻을 같이 한 몇몇 차 인들이 모여 우리 차 마시기 계몽을 시작하였고 한국 차인 회를 구성했으며, 첫 사업으로 일지 암을 복원하고 1983년 총회 이후 연합회로 개편, 오늘 이르고 있으며 특히 국가적 차원으로 진행되고 있는 전통문화 계승 운동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다.
5. 차의 정신
차 생활에는 법도 있고, 의식이 있고, 절도가 있고, 예절이 있고, 일거리가 있고, 기술이 있고, 기교가 있고, 즐거움이 있고, 예능이 있다. 이러한 경지를 초월하여 달관한 경지에 으르면 절대자의 경지인 다 성이요, 다신 이요, 다산이 될 수 잇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밥 먹듯, 숭늉 마시듯 하는 생활을 한다면, 이러한 차 생활은 상식적인 수준이다. 여기에는 법도나 예절이 있을 수 없으며 오직 갈증을 없애주는 숭늉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차 생활이 오랜 세월을 두고 거듭하다가 보면 나름대로 법도가 생기고 체계가 잡히게 되는데. 이쯤 되면 과학적 차원으로 승화하게 되는 것이다. 즉 차 생활의 일정한 법도와 의식과 예절과 차를 만들고 끓이는 기술과 그에 따르는 제반의 익숙한 솜씨는 모두가 과학적 차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차를 끓이는 이는 일정한 법도와, 관혼상제 시 차를 올리는 의식과, 손님에게 차를 대접하는 예절과, 차를 잘 만드는 기술과, 차를 맛있게 끓이는 솜씨와, 차를 다룰 때 행하는 일반적인 모든 일들이 일사불란하게 잘 이루어져야 하며, 이러한 제반 행동은 모두가 과학적이라는 차원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익숙한 솜씨와 정돈된 행다법에서 얻어지는 쾌락과 예술적 심미 감이 있다면 이는 철학적 경지라 아니할 수 없다.
우리가 평소에 차 생활을 통해서 얻는 정성적 안정감이나 정신작용에 의한 자기 구현이 바로 철학적 경지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차 생활이나 그 발전 향상으로 얻어진 법도와 의식과 예절과 행다에 따른 기술적인 동작은 모두 행동구법에 따른 육체적 동작이요, 물직적인 행동반경의 영역에 속하므로 형이하적인 동작과 과정을 통해서 승화된 정신 세계의 예술적 심미감이나 마음의 편안과 쾌락은 형이상 학적인 문제로써 정신 작용의 영역이다. 그래서 물질적인 변화가 정신적 변화를 고무시킬 수 있도록 이루어진 의식과 법도가 바로 차 생활이 요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요즈음 항간에서 많은 행해지고 있는 전통 다도강좌나 전통다례의식 발표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지만, 더욱이 차를 끓여 대접하는 예절과 방법을 '다도'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이 있다. 이는 지극히 위험한 생각으로 하루 속히 고쳐야 할 일이다. 다도란 차 생활을 통해서 얻어지는 깨달음의 경 지음의 경지이지, 차 생활의 예절이나 법도, 그리고 차를 행다법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차를 대접하는 예법이요 차를 끓이는 방법일 뿐이지 결코 다도는 아니다. 그리고 또 '다도'가 옳다. '다례'가 옳다. 또는 '다예'가 옳다고 하여 많은 시비와 논란의 대성이 된 바 있는데, 이는 道와 禮와 藝가 의미하는 뜻을 잘 모르기 때문에 빚어진 신비라고 할 수 있다. 道의 경지와 禮의 경지와 藝의 차원이 각기 다르다고 하는 점을 알게 되면 그러한 논란은 자연히 해소될 줄로 믿는다. 禮는 차 생활의 예법이요 행동의식인 과학적인 차원이요 행이 학적인 범주이다. 그리고 禮는 과학적인 차원인 차 생활의 禮儀凡節과 法道를 통하여 얻어지는 정신세계의 審美眼적 예술세계요, 그 예술성을 포함한 정신적인 만족감 등을 말한다.
그리고 道라고 하는 경지는 形而上學的인 경지에서 최고로 승화되어 이루어진 절대의 경지요, 진리의 차원이다. 이 경지에 이른 사람을 우리는 성인이요, 군자요, 도인 이라고 말한다.
이 경지는 完璧한 깨달음의 경지로서 상대적인 것이 무너지고, 오직 하나의 세계로 선악과 시비와 무와 색채와 형상과 언어가 떨어진 경지이다. 이처럼 道는 절대 경지요, 禮는 철학적 경지요, 藝는 과학적 차원으로서 엄격한 차별이 있는데, 이것이 옳다, 저것이 그르다 라고 말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네 조상들이 완성해 놓은 차문화를 소급해보면 그곳에는 道와, 藝와, 禮의 경지가 다 포함되어 있다.
차를 행함에는 어느 것 하나 예술이 아닌 것이 없다. 먼저 하심 하는 마음가짐 이어야 하며 마음이 깊은 바닷속처럼 흔들리지 않는 “하심 하는 자세”로 임하여 자기를 낮출 수 있는 데까지 낮추어야만 하며 또한 인내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모든 다기를 소중하고 귀하게 다루어 야하며, 예의범절을 몸에 익혀 눈의 표정, 입의 표정, 손동작 등 하나하나에까지 올바른 자세, 옷 매무새, 의복의 선택과 앉음새, 걸음걸이, 대인관개에 까지도 세심한 주의를 해야만 한다.
Comentários